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5세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5.staticflickr.com/5096807131_4170c7c3f4_z.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ing_George_1923_LCCN2014715558_(cropped).jpg|width=100%]]}}} || || [[영국 해군]] [[사관후보생]] 시절 || 말년의 모습 || 본명은 조지 프레데릭 어니스트 앨버트로 [[에드워드 7세|웨일스 공 앨버트 에드워드]]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3남 3녀 중 둘째이자 차남이고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의 여덟 번째 손주이자 차손으로 태어났다. 계승 서열은 아버지 [[에드워드 7세|앨버트 에드워드 왕세자]]와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에 이어서 3위였다. 그의 위로는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이, 밑으로는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루이즈 공주]], 빅토리아 공주, [[웨일스의 모드|모드 공주]]와 남동생 알렉산더 존 왕자가 있었다. 이 중 알렉산더 존은 조산아로 태어나고 하루 만에 요절했고 앨버트 빅터는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죽었다. 그의 왕비는 [[테크의 메리]][* 외숙모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올가 왕비]]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조지의 장인이자 메리 왕비의 아버지인 [[프란츠 폰 테크]]가 올가 왕비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대공비의 외사촌이다.][* 둘 다 [[조지 3세]]의 후손이다. 조지 3세가 조지 5세에게는 진외고조할아버지가 되고 메리에게는 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따라서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장모 메리 애들레이드는 사촌 관계이기도 하다.]인데 원래는 형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그가 결혼 직전인 [[1892년]] [[1월 14일]]에 28세의 나이에 독감으로 요절해서 조지가 형의 약혼녀 메리를 신부로 맞은 것이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뜻에 따른 결혼이었으나 둘은 평생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모부이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가 있다.] 둘은 장남 [[에드워드 8세|에드워드]], 차남 [[조지 6세|앨버트]], 고명딸 [[프린세스 로열 메리(1897)|메리 공주]],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헨리]]와 4남 [[켄트 공작 조지|조지]] 그리고 5남이자 막내인 [[영국의 존|존]] 왕자를 두었다. 군주로서의 소양이 필요한 교육은 모두 후계자였던 형 앨버트의 몫이었고, 조지는 자기가 왕이 될 거라고는 까맣게 모른 채 적성을 찾아 [[해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 어릴 때부터 밀덕이었으니 [[덕업일치]]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1892년 형 앨버트 왕자가 급사하며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왕세손[* 이때는 아직 할머니 빅토리아가 살아있었기에 아버지 에드워드도 왕세자였다.]이 되어, 전유럽의 군주제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굳건한 의지와 책임감으로 왕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한편 군주의 소양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나중에 그의 발목을 붙잡기도 했는데, 단어 '지식인(highbrow)"과 "눈썹(eyebrow)"를 혼동하고, 심지어 철도 짐꾼의 지적 수준에 머물러있다는 평을 듣는 등 그의 형 앨버트 빅터 왕자와 더불어서 지적으로 우수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다. 형이 사망하고 자신이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된 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요크 공작에 서임되었으며, 미래의 군주 즉위를 대비해 별도로 붙여진 교사로부터 헌법사 수업을 듣기도 했다. 한편 그는 주로 노퍽의 작은 별장인 요크 별장(York villa)에 거주했는데, 이는 그의 취미가 사냥이나 낚시처럼 일반적인 사교계나 문화생활 참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들 내외의 삶은 왕족이라기보단 중산층의 삶에 가까웠으며, 방문자들은 그 별장을 작고 침울한 별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부인인 메리 또한 이런 삶을 지루해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당시 조지 5세는 이런 삶을 매우 즐긴 것으로 보이는데, 심지어 그가 모은 우표 수집 앨범에는 당시 대영제국에서 발매했던 모든 앨범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양이 무려 '''각각 50쪽자리 앨범 328개'''. 이후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아버지 앨버트 왕세자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하자 자신은 계승 서열 1위인 왕세자로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작위를 받았고 9개월 동안 해외순방을 한 뒤[* 이때 자녀들은 조부모인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부부에게 맡겨져 각별한 사랑과 돌봄을 받았고 특히 [[테크의 메리|웨일스 공비 메리]]는 자녀들을 매우 아껴서 자녀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공무로 떨어져 눈물을 흘리기도 할 정도였다.] 생일날인 11월 9일에 정식으로 왕세자인 [[웨일스 공|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되었다. 1901년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대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들을 차례로 순회했는데, 이는 당시 식민지부 장관인 조지프 체임벌린이 기획한 것으로 [[보어 전쟁]]에 참가한 식민지들에 대한 보상을 내리는 성격이 있었다. 이 행사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나 자치령 백인들과 여러 아프리카 지도자들로부터 환영받았지만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거주하는 [[보어인]]들은 그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어 전쟁]]으로 인한 영국에 대한 보어인들의 반감 때문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출범한 것이 당시였는데, 조지 5세는 호주 의회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의회의 개회를 맡았다. 한편 그는 뉴질랜드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나 다른 지역에 비해 본토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을 키우기도 했다. 한편 1905년에는 인도를 방문했는데, 그는 인도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백인의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혐오감을 느껴 인도인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인도 방문 이후 스페인에서 벌어진 [[알폰소 13세]]의 결혼식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신랑과 신부를 노리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 휘말릴 뻔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jpg|width=100%]]}}} || ||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br]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왕국|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br]앞줄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조지 5세]] 본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 [[파일: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jpg]] 조지 5세 시대의 각국 군주들. 1910년, 부왕 [[에드워드 7세]]가 죽자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한편 조지 5세는 즉위식에서 읽는 즉위 선언문은 성공회의 수호자라는 영국 국왕의 책무에 따라 전통적으로 [[반가톨릭주의|반가톨릭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전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공공연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 그는 이 내용을 읽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새로 길이가 짧아지고 반가톨릭적인 내용이 지워진 새로운 즉위 선언문이 쓰여졌다. 즉위 1년 후인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그 후 아일랜드와 영국령 [[인도 제국]]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로서 델리에서 접견받은 첫 사례라고 한다. 그 후 인도 전역을 순회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왕실이 본래 [[독일]]의 공작 가문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당시 가문의 당주는 막내 사촌동생인 [[카를 에두아르트]]]였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반독일 감정을 고려해 영국 왕실의 역사적 거주지인 윈저 성의 이름을 따라 가문명을 윈저로 개명하였다. 이때 덩달아 강제로 개명된 가문 이름이 독일의 명문가 바텐베르크(Battenberg)이다.[* 19세기 중엽, 헤센-다름슈타트 대공 루트비히 3세의 동생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알렉산더]]와 율리아 하우케 여백작의 [[귀천상혼]]으로 생겨난 가문이다.]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berg)'를 같은 의미의 영단어 '마운트(mount)'로 고치고, '바텐(Batten)'을 영어식 독음인 '배튼'으로 바꾼 뒤 본래 배열과 바꿔서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개명했다. 조지 5세의 친척들이기도 했던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들은 "그동안 영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창씨개명|성씨를 갈아버리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다만 바텐베르크의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제1해군경에 있었고 얼마 뒤 중순양함 세척이 독일 유보트에 '''1척에게''' 격침된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다. 격침된 것 자체가 비난받을 건 아니고 고작 잠수함 한 척에게 중대형함이 격침당하는 건 분명 해군성에 스파이가 있을 것이고 그 스파이는 독일계인 바텐베르크 가문일 거라는 이야기. 결국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해군성의 바텐베르크]]는 제1해군경에서 사직해야 했고, 가문은 결국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한다. 이 해군성의 바텐베르크의 둘째 아들이 마지막 인도 총독이자 제1해군경을 지낸 [[루이 마운트배튼]].] 사촌인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라는 희곡 제목을 비꼬아서 "[[셰익스피어]]의 희극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봐야겠다"고 빈정댔다. 그래도 이 바텐베르크 가문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축에 속한다. 이들은 독일어를 영어로 바꾼 수준으로 개명했지만, 독일과의 연관이 더 큰 가문들은 얄짤없이 원래 이름을 내다버려야 했다. 예를 들자면 [[테크의 메리|메리 왕비]]의 친정인 테크 공작 가문은 원래 이름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케임브리지 가문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 친척들은 독일의 본가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폐위되어 버리게 되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에서 1911년에 예산안에 대해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했는데, 조지 5세는 상원을 압박해 1911년 의회법(Parliament Act)을 통과시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서민원이 선출되지 않은 귀족원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다. 한편 1928년에 대공황이 벌어지자 대공황 수습 대책을 대신들과 논의하기도 했다. [[1915년]]에 있었던 낙마 사고와 [[제1차 세계대전]], 지속적인 [[흡연]] 등이 맞물려 건강이 점점 악화되었다. 만성적인 기관지염으로 세 차례나 요양을 갔고 [[1928년]] [[11월]]에는 [[패혈증]]에 걸렸다. 말년에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으며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어쩌다가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치매에 걸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계속했으며[* 영화 [[킹스 스피치]]에 묘사된다.]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주치의인 도슨 경은 안락사를 옹호하던 의사였는데, 조지 5세가 감기 증세까지 겹쳐 임종이 임박해지자 국왕의 위엄있고 평안한 죽음을 위하여 '''조지 5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시해|치사량의 약물을 주입했다.]] 강한 종교적 신념이 있었던 [[테크의 메리|메리 왕비]]와 [[에드워드 8세|웨일스 공]]은 이를 분명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아무튼 왕실 관계자들이나 간호사든 간에 그냥 통상적인 주사를 놓는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도슨경의 의도를 몰랐고, 주사를 놓은지 약 1시간 뒤인 [[1936년]] [[1월 20일]] 밤 11시 55분에 세상을 떴다.[* 사망한 또 다른 원인은 여동생들중에서도 특히 가장 사이가 좋았던 둘째 여동생인 빅토리아 공주가 자신의 저택에서 죽자 이에 여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조지 5세가 빅토리아의 사후 한 달만에 죽었을 수도 있다.] 조지 5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제국은 어떠한가?"[* 이것도 내치를 걱정했던 왕의 마지막 의무감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조지 5세는 마지막 순간에 치매에 걸린 상태였으며, '제국'도 무슨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지 5세가 정신을 차렸을 때마다 기억 속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냐는 식으로 묻는 와중에 나온 것이 제국은 어떤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들렸다는 듯.]라고 당시 비서가 증언을 했지만, 진짜로 죽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봤던 주치의 도슨 경의 기록에 의하면 조지 5세의 마지막 말은 간호사가 진통제로 모르핀을 주사하려고 했을 때 했던 "이 빌어먹을 놈아"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한참 동안 비밀에 묻혀졌다가[* 도슨 경이 1945년 사망할 때까지도 상원의원직을 역임한 거만 봐도 왕실관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50년 뒤인 [[1986년]]에 공개되었다. 참고로 도슨 경이 조지 5세의 승하 소식을 전한 곳이 타임지였다. 생전에는 자식들한테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 이게 좀 막장 부모 수준이었다.[* 원래 왕위에 오를 예정이 아니었고 본인도 직업군인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군인 정신이 매우 강했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조지 5세의 자식들과 자주 놀아주며 손주들을 많이 예뻐해줬다.] 그러나 성격이 난폭했다거나 자식들에게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년 시절부터 사관학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배운 인간관계가 군대식 인간관계 뿐인 게 문제였다. 자식들이 어렸을 때에는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좀 더 자라서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작할 때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본인이 경험한 거라고는 군대식 교육법 뿐이었기 때문.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캐넌다인 교수는 조지 5세에 대해서 '국민의 아버지 노릇은 완벽하게 했으나, 정작 자기 아이들 아버지 노릇하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것 때문에 자식들과의 관계도 별로 좋지 못한 편이었다고. 그래도 반항하기 일쑤였던 장남 [[에드워드 8세]]보다는 눈물 많고 소심했지만[* [[말더듬]] 증세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자세 교정을 받으면서 더 심해졌다고. 후일 [[킹스 스피치|언어치료를 받아 증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고 연설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했다고 한다.]]] 말 잘 듣던 차남 [[조지 6세]]를 좀더 편애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무서운 아버지가 손주바보 할아버지가 되는 경우가 곧잘 있는 것처럼, 손녀들이 태어난 뒤로는 할아버지 노릇은 잘 했다. 오죽하면 말년에는 차남이 왕이 돼서 손녀한테 왕관을 물려줬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물론 속썩이는 장남이 못마땅했던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그냥 '차라리 둘째가 낫겠다' 하는 정도를 넘어 '손녀에게 왕위가 갔으면 좋겠다'고까지 한 걸 보면 손녀바보였던 게 맞는 듯하다. 그리고 조지 5세가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며 왕위를 포기하고 퇴위하자, 차남인 [[조지 6세]]가 왕이 되고 그의 장녀(즉 조지 5세의 장손녀)가 후계를 이어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